하루 종일 틀리는 시계와 하루에 두 번 맞는 시계
[칼럼] 이른바 ‘이해찬 세대’ 논란을 보며...
입력 :2007-10-10 11:30:00 김진경 작가(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
1.
“여기에 하루 종일 틀리는 시계와 하루에 두 번 맞는 시계가 있다. 당신은 어떤 시계를 선택하겠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하루 종일 틀리는 시계를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루 종일 틀리는 시계야말로 열심히 가고 있는 시계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가고 있는 시계는 그 시간의 오차가 두세 시간씩 크게 나더라도 우리 삶의 지침이 될 수 있다. 그 시간의 오차를 감안해서 보면 되니까. 반면 하루에 두 번 맞는 시계는 죽어있는 시계이다. 멈추어 있는 시계는 하루에 두 번은 정확하게 시간을 맞춘다. 그러나 그 시계는 우리의 삶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계를 믿고 살면 삶이 망가져 버릴 수도 있다.
개혁이란, 비유하자면, 하루 종일 틀리는 시계이다. 개혁은 늘 막강한 저항과 일정 정도의 시행착오를 안고 진전되어 나가기 때문에 늘 오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과거로의 회귀는, 비유하자면, 멈추어 있는 시계이다. 하루에 두 번은 정확히 시간을 맞추는데 그 정확성과 안정감이란 죽어 있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참 이상한 선택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틀리는 시계의 시간적 오차를 비난하면서 멈추어 있는 시계가 갖는 하루 두 번의 정확성과 안정감을 선택하고 있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를 사로잡고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일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 구성원들을 사로잡고 있는 공통된 정서를 하나만 들라면,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 대선국면을 움직이고 있는 대중적 정서 역시 이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앞날이 몹시 불안하고, 그 불안한 미래를 헤쳐 나갈 뚜렷한 길이 잘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대개 익숙하게 알고 있는 길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익숙한 길이란 이제까지 자기가 걸어 왔던 길, 우리 사회로 말하자면 개발독재형 산업사회의 길이다. 이것이 한반도 대운하같이 전형적인 개발독재형 정책을 공약으로 건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50% 넘는 지지를 얻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조금만 좌우를 돌아보며 생각해 보면, 이 익숙한 길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국제적 분업관계 속에서 60, 70, 80년대에 한국이 맡고 있던 역할은 이미 중국과 동남아로 넘어간 지 오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고도산업과 고도산업을 넘어서는 콘텐츠 개발형 드림산업을 강화하는 한편 남북 간의 협력체계 강화를 통해 경제적 활로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시기에 개발독재형 산업사회의 길, 냉전적 사고로의 회귀라니? 논리적으로는 참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은 논리적 설득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 저렇게 미래를 헤쳐 나가면 되겠구나!’ 싶은 확실하고 구체적인 정책과 그것의 실현에 대한 믿음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불안하기 때문에 자기가 경험적으로 가장 확실하게 알고 있는 과거의 길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대선정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보수적 흐름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은 개혁세력에게 있다. 특히 신뢰할 만한 비젼을 제시함으로써 보수적 흐름을 막는 계기가 되어야 할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 경선이 조직대결로 치달아 정책이 실종되어 버린 것은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 시대 우리사회의 화두가 근대화 즉 산업사회로의 진입이었다면, 김영삼 정부 이래 우리 사회의 화두는 개혁 즉 산업사회에서 지식기반사회로의 이행이었다. 이 산업사회형 사고와 시스템의 개혁이 본격적인 사회적 의제로 제기된 것은 5·31 교육개혁안부터였다.
5·31 교육개혁안은 김영삼 정부에서 입안된 이래 김대중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실행되기 시작했고, 현재의 교육정책도 그 연장선에 있어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 시절 이해찬 교육부장관 교육정책의 공과를 둘러싼 논란은 단순히 한 장관에 대한 평가를 넘어 5·31 교육개혁안 전체에 대한 평가와 관련되며 앞으로 교육체계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하는가 하는 방향성과도 관련된다. 이것이 필자가 굳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2.
5·31 교육개혁안은 산업사회 교육체계를 지식정보화사회 교육체계로 바꾸어 나가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5·31 교육개혁안이 극복하고자 하는 산업사회 교육체계란 무엇인가? 그 핵심은 박정희 시대의 경제근대화 논리에 잘 요약되어 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근대화 논리는 “서구의 지식을 빨리 빨리 받아들여, 될 수 있는 한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에게 주입 암기시킴으로써 서구 선진국을 하루 속히 따라 잡아야 한다.”로 요약된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구축된 학교교육 체계에서 지식을 생산하는 단위는 한국의 대학이 아니고 서구의 대학이다. 한국의 대학은 기성품인 서구의 지식을 수입 가공하는 단위 이상이 아니다. 즉 (1)산업사회 교육체계의 가장 큰 특징은 지식생산형이 아니라 지식소비형이라는 점이다.
이 지식소비형 교육체계에서는 지식의 원천인 서구대학에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에 따라 대학이 서열화된다. 서구지식의 수입 통로에 가까이 있는 서울대가 1번이고 서울의 유수 대학들이 그 다음을 차지하고, 지방대들이 서열의 뒷자리를 차지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초중등학교나 학생 개개인도 서구 지식을 얼마나 잘 암기했느냐를 평가하는 획일적 점수에 따라 서열화된다. 즉 (2) 산업사회 교육체계의 두 번째 큰 특징은 획일적 점수에 따라 학교와 학생이 철저히 서열화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산업사회 교육체계를 지식기반사회에서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에 가깝다. 생각해 보라. 새로운 지식의 창출이 가장 큰 힘이 되는 시대에 대학이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단위가 아니라 기성품의 지식을 수입하는 단위로 계속 머물러 있다면 그 나라는 3류 국가로 전락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또 지식기반사회에서 초중고 학생들이 다양한 자기 적성과 특기를 살려 창조적 힘을 기르지 않고, 수입한 지식의 암기에만 매달려 있다면 그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1) 대학을 지식 생산단위로 강화하는 것과 (2) 초중등학교 교육을 학생들의 특기 적성을 살려 창조력을 기르는 방향에서 다양화하는 것이 5·31 교육개혁안의 핵심일 수밖에 없었다. 이 5·31 교육개혁안은 김영삼 정부에서 입안되었지만 그 본격적 시행은 김대중 정부 특히 이해찬 교육부장관 때부터 이루어졌다.
이해찬 교육부총리 시절, 대학을 지식생산단위로 강화하기 위한 핵심정책은 서울대학의 대학원 중심대학, 연구 중심대학으로의 전환이었다. 학부생 숫자를 대폭 줄이고 대학원 중심 대학, 연구 중심 대학으로 전환하면 매년 수천억의 연구비를 지원하여 서울대학을 세계적으로 평가받는 대학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정책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을 때 기대되는 효과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서울대의 연구 중심대학으로의 전환이 자연스럽게 역량이 있는 이른바 일류대학들의 연구 중심대학으로의 전환을 촉발하여 전반적으로 우리 대학을 지식 생산단위로서 강화하리라는 기대이다. 다른 하나는 서울대를 비롯한 이른바 일류대의 학부생 숫자를 대폭 줄임으로써 중장기적으로 고질적인 학벌을 해체할 수 있다는 기대이다.
현재 같이 이른바 일류대들이 매년 각각 5,000명, 도합 2-3만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그 졸업생들이 사회 각 분야의 상층부에 진출하여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체제가 지속되어서는 학벌사회는 영원히 해체될 수 없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입시경쟁도 해소될 수 없다.
이렇게 살피고 보면, 서울대의 학부생 숫자 축소와 연구 중심대학으로의 전환은 지식기반사회 교육체계로의 전환에 있어 핵심 고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개혁정책은 이 핵심 고리에서부터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수천억의 정책 실현 수단과 강력한 행정력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대는 학부생 숫자를 소폭 줄이는 선에서 부분적으로 정책을 수용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서울대의 연구중심대학으로의 전환을 전제로 마련되었던 수천억의 재정은 여러 대학에 나누어 주게 되었는데 그것이 BK21이다.
초중등 교육에서 학생의 다양한 특기 적성을 살려 창조력을 기르도록 한다는 방향의 정책은 대학학생선발의 다양화, 특기 적성 교육 강화, 고 2,3 과정에서 선택교과의 강화, 학교운영위원회 제도의 도입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정책들 역시 유형무형의 저항과 시행착오 때문에 부분적 성과에 그쳤다.
그러나 이해찬 교육부장관 시절의 교육정책은 종결된 것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그 이후의 교육정책들이 그 연장선에서 진행되고 있고 정책에 대한 강력한 저항 역시 지속되고 있다. 우리의 학교교육은 여전히 지식기반사회에 맞는 체계로 변화해 갈 것인가 산업사회 교육체계로 회귀하여 우리사회의 진전에 걸림돌이 될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사회변화가 가장 빨리 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이들에게서이다. 아이들이 질적인 변화를 보인 것은 1990년에서 1995년 사이다. 89년에 해직되어 94년에 복직한 전교조 해직교사들이 질적으로 변한 아이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정신과 치료까지 받은 경우도 부지기수니까 그 변화의 폭을 짐작할 만하다. 언론에서 교실붕괴를 시끄럽게 외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어쩌면 그 시기의 아이들에게서 지식기반사회, 소비사회로의 변화가 가장 먼저 체화되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식기반사회형, 소비사회형으로 변한 아이들에게 산업사회형의 학교가 맞지 않아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5·31 교육개혁안은 지식기반사회형 소비사회형으로 변한 아이들에게 맞게 학교체계를 바꾸려 했다는 점에서 매우 시의 적절한 것이었고, 그것을 현실화 하는 데서 나타난 시행착오를 제외하면 올바른 방향의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이 저항에 부딪쳐 지연되면서 나타난 지금의 학교 모습은 너무도 참담하다.
좀 과장하자면 대부분의 중등학교에서 사실상 수업진행이 어렵다. 이른바 잘 나간다는 강남의 인문계 고등학교도 학교에서 의미 있는 지도를 받는 아이들은 800명 중 일류대반으로 분류되는 50명 정도이다. 아무리 확대해도 수도권 대학에 진학하는 150명 선을 넘지 않는다. 나머지 650명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아무런 배려도 받지 못한 채 자거나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다.
정년을 62세로 낮춘 것을 불쾌해 했던 교사들은 정년은 고사하고 기회와 여건만 되면 50대에 명예퇴직을 하려 한다. 아이들과의 관계가 너무 힘들고 그래서 교직에서 보람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피고 보면, ‘이해찬 세대’가 있는 게 아니라 지식기반사회를 체화한 사이버 세대와 그 세대에게 질곡으로 작용하는 산업사회형 학교가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기반사회형 학교체제로의 변화는 실패한 정책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 내야만 할 미완성의 과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지금의 교육현실은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가 무엇인가를 되물어 보게 한다.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가 과연 아이들에게 많은 지식을 갖추게 하는 것일까? 아니다.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아이들이 자기 삶에 의욕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아인슈타인의 머리를 가지고 있고 그 이상의 지식을 갖추었다고 해도 자기 삶에 의욕을 갖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창조해 낼 수 없다. 반면 자기 삶에 의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필요성만 느끼면 언제라도 필요한 지식을 갖출 수 있고 무엇이 되었든 창조해 낼 수 있다.
지금 학교의 기본 기능이라는 지식전수 기능이 마비되는 이유는 학교에 지식 전수의 전문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아이들이 자기 삶에 의욕을 갖지 않기 때문에 지식전수 기능도 마비되는 것이다. 여전히 산업사회형에 머물러 있는 우리 학교교육의 가장 큰 폐단은 고등학교 졸업에 이르는 동안 아이들로 하여금 인생에 넌덜머리가 나게 만든다는 점일 것이다. 인생에 넌덜머리가 나서 자기 삶에 의욕을 갖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갖추었다 해도 무슨 소용인가?
정말로 교과담임, 학급담임 이외에 진로담임제라도 도입해야 하는 게 아닐까? 진로담임은 꼭 교사만이 아니라 학부모나 사회인이 맡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적어도 한번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계획해 보고 시도와 좌절도 해 보고, 좌절을 넘어 성취의 희열을 맞볼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 보면 아이들이 자기 삶에 의욕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자기 삶에 의욕을 가지면 학교의 지식전수기능도 살아날 수 있다. 5·31 교육개혁안의 기본 취지는 이와 다르지 않다.
3.
사정이 이러한데 세계적인 미래학자들은 지식기반사회 이후의 사회로서 드림소사이어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드림소사이어티란 부가가치가 높은 콘텐츠 개발형 산업이 주도하는 사회를 뜻한다. 미국은 영화, 항공우주, 금융으로 먹고 살고, 프랑스는 명품 산업으로 먹고 살고, 영국이 스토리 산업 애니메이션 등으로 먹고 살겠다고 나선 것 등이 그 예이다.
이 드림소사이어티의 기준에서 한국사회를 보면 참 갈 길이 멀어 보이고, 우선 질문하는 법부터 바꿔야 한다는 생각부터 든다. 예컨대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을 20년 넘게 먹여 살린 신발산업은 국제 분업관계의 변화에 따라 인건비가 싼 중국과 동남아로 넘어 갔다고 속 편하게 말할 게 아니라 왜 20년 이상 부산을 먹여 살린 신발산업이 명품 브랜드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20년 이상 우리나라를 먹여 살린 섬유산업이 왜 명품 브랜드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우리나라 IT 산업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할 게 아니라 왜 우리나라 IT산업은 부가가치가 낮은 하드웨어 개발에만 머무르고 부가가치가 높은 소프트웨어 개발로 나가지 못하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산업사회형 사고와 시스템이 창조력을 압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 김진경 작가(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
출처_ 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le_view.aspx?at_id=65023